아스타틴은 어린 시절을, 한 인간 남자가 집에 찾아오기 전까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하프엘프치고는) 좋은 나날을 보냈다고 회상한다. 그는 찾아온 인간 남자를 좋지 않게 기억한다. 엄마가 잠시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행동했으면서, 차를 들고 온 엄마를 보자 표정을 바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정색하며 지하실에 물건을 꺼내는 걸 도와달라고 남자에게 말을 건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꺼내려 지하실에 갔다 온 사이 엄마와 남자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남자가 가고나서 양친의 행동들을 봐선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게다가 이젠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고.
금방 돌아온다고 약속하며 외출했던 엄마는 며칠이 지났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아빠는 또 가쁜 숨을 내쉬다가 정신을 잃었다. 아스타틴 자신이 보기엔 유난히 앓고 침대에서 거의 내려온 적이 없던 아빠였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 그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도와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에미넴 숲 깊숙히 사는 아빠 쪽 친척들은 아스타틴 자신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와달라고 찾아가면 모질게 뿌리치지 않을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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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 다크엘프 텔루르가 마침 들리지 않았다면 아스타틴은 아빠의 유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가는 친구에게 부탁을 받은 텔루르는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닌 듯 싶었지만 양어머니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그녀는 장례를 도와주며 몸 깊숙하게 스며든 차가운 바람이 결국 네 아빠를 죽인 셈이라고 말했지만, 당시의 아스타틴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예전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그 때 입은 상처들에서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다.
장례가 끝나고 텔루르는 자신보다는 훨씬 더 나을 거라고 말하며 아빠 쪽 친척들한테 데려다주었다. 아빠 쪽 친척들은 인간 피가 섞인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친척들 역시 사냥꾼들에게 잡혀 노예가 되고 실종되고 난리도 아니었던 상태였고, 자신들 건사하는 것에 바빠서 혼혈 따위엔 신경을 써줄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떻게 지내나 들렸던 텔루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더욱 다른 존재의 눈치를 보고 소심하게 변한 5살의 자신을 보며 혀를 차면서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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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틴이 기억하는 텔루르는 엄격하고 냉정했지만 가끔씩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존재였다. 문득 부모 잃고 외로운 설움이 복받쳐서 통곡할 때면 말없이 안아주기도 했다. “가우르 너무 귀찮게 하면 할퀸댔지? 울지 말고 손 이리 내거라, 싸매어주마.” 그녀는 금이야 옥이야 싸고들지 않았고 경험을 통해 가르쳤다. 아스타틴에게 혼혈이라는 사실도 알려준 것도, 세상이 혼혈에 대해 얼마나 가혹한지 알려준 것도 다름아닌 그녀였다. 아스타틴은 그녀를 진심으로 따르고 좋아했다. 심지어 그녀가 심한 소리를 할 때도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텔루르는 자신이 봐왔던 존재 중 여러모로 존경스러운 존재인데다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행방을 모르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자 가족이었다. 그녀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는 내가 뭘 잘못했나 상당히 머리를 굴렸고, 양어머니에게까지 버림 받을까봐 늘 조바심을 냈다. 에미넴 숲에서 나오면서 들었던 그녀의 말은 정말 잊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말 애는 못 키우겠는데.. 무능한 엘프 놈들!”
그녀를 따라다니며, 무기가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동물들이 먹다 남긴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고, 식물들을 구분짓기 시작하고, 수풀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자 나이가 어느덧 10대 중반이 되었다. 날씨도 제법 알아맞출 수 있었고, 가우르 '히말'과 히말이 마사다 요새 함락이 일어날 무렵에 낳은 새끼 '루테리온'을 돌보는 것에도 상당히 능숙해졌다. 허무의 대지와 카레발리나섬을 제외한 안할리스 전역에 대해 대략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전문적인 의학 지식은 없지만 간단한 약들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독이 있는 동식물을 구별하고 채집하거나 다루는데도 꽤 능수능란해졌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저녁의 풍경은 늘 비슷했다. 대충 배를 채우고 주변을 치워 잠자리를 마련하고 히말의 그릉거림을 반주삼아 류트를 연주하다가 잠들기. 이 매력적인 악기에 손을 댄 건 사소한 이유였다. 텔루르가, 양어머니가 서툴기는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고 칭찬 해주었기 때문에.
가끔 필요한 물건을 구한다던지의 이유로 인간들의 마을로 들어가기도 했다. 몇 번 혼혈이라는 걸 들켜서 아찔하다면 아찔한 순간을 맞았기에, 마을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는 것은 물론이고 천으로 귀가 다친 듯 눌러 싸매보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노스텔지어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도 인간의 마을에서였다. 마사다 요새 붕괴라는 일이 벌어진 직후였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내린 둘의 평가는 미묘하게 어긋났다. 아스타틴은 종족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엄청난 일을 이루었다는 것에 호의적이었고, 텔루르는 여러모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애초에 텔루르는 노스텔지어 자체도 그닥 탐탁해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의 양어머니는 집단 자체에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그 날 저녁,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건 한번도 없던 일이었다. 왜 홀로 다녔는지. 왜 집단에 그토록 부정적인지. 흑요정 대부분은 혼혈 특히 인간과의 혼혈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나마 텔루르 자신은 동족 전사와 결투라는 형식을 거쳐 추방되는 선에서 그쳤노라고 냉정하게 덧붙였다. 아스타틴은 그날 텔루르 역시 혼혈이었다는 걸 알았고, 텔루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는 걸 알았고, 간결하고 짧은 이야기 속에서 오랜 시간 가지고 있을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다크엘프로써 지낼 때의 이름이나 결투를 하게 된 원인은 말하기 싫어해서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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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틴이 26세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중한 양어머니 텔루르가 죽었다. 잠시 이동하던 중에 쉬던 중이었다. 갑자기 인간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도망가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달려들려는 텔루르를 막고 도망가자고 했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어도 그녀는 그 말에 따라줬다. 그리고 그건 아스타틴이 가장 후회하는 일이 되었다. 인간 병사들에게 죽거나 노예사냥꾼에게 팔려갔더라도 미끼가 되서 소중한 양어머니로부터 떨어뜨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멀리 더 멀리. 무사히 도망치기는 했다. 어머니는 도망치다가 화살에 맞았고, 그게 치명타였다. 아버지가 죽어가던 때와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어가는 양어머니를 향해 눈물콧물 쏟아내며 울부짖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라고 부른 건 처음이었다. 늘 이름으로만 불렀고 한번도 엄마라고 불러보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자신 탓인 것 같았다. 텔루르의 장례를 치루면서, 아스타틴의 내면에선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무력감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다 못해 병사들을 지휘하던 장교를 죽이고 안힐라스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한 장소에 오래 있지 않았다. 죽인 장교가 의외로 높은 존재였는지 인간들 마을에만 들어서면 왠 어중이떠중이 현상금 사냥꾼들이 달라붙었다. 이종족 마을들을 발견해도 머물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조금 머물다가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곤 했다. 그걸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노스탤지어의 문을 어떻게 두들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신을 추스리고 보니 이미 소속되어 있었다. 노스탤지어에 들어와서 아시타를 통해 좀 친해진 드워프가 사정을 듣고 측은하게 여겨서 애도용 장신구를 만들어주었고, 그는 장례를 치르며 베어낸 텔루르의 머리카락을 꼬아 넣었다. 이 장신구는 소중한 양어머니가 한때 안힐라스에 살았음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물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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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에 들어와서, 아스타틴은 요원들을 특정 지역까지 안내해주는 임무를 몇 번 받았다. 안내를 받았던 요원 대부분이 노스탤지어에 들어온 것을 보면 나름 생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뭔가 덜 성숙한 아이같다고 생각한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는 이들은 좀 이기적이고 약간 편협한 면도 있고, 생각하는 것이 다르면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아시타처럼 뭔가 상처를 받았고 두려워한다는 걸 보는 이도 있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좀 드문 편이다.
가끔 아스타틴의 내면에선 용기를 내어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충동이 샘솟는다. 그런데 한편으로 두려워한다. 텔루르와 그랬던 것처럼, 아시타처럼 다른 이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에서 막 벗어났는데 또 그런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니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다. 너무 혼란스러워 견딜 수 없는 날에는 양어머니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던 날을 떠올리곤 한다. 아스타틴이 노스탤지어의 활동에 호감을 느꼈고 문을 조심스레 두드릴 수 있었던 건 다름아닌 그녀 때문이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아이를 키워낸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이타적인 행동이었고, 아스타틴 자신 역시 그런 모습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죽음 이후 조금 일그러져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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